언제나 내 시선의 끝엔 당신이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내가 아니라 칼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좋았다.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믿었다. 내가 멍하니 활시위를 당기는 척 하고 있노라면, 당신은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서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줬다. 나는 당신을 차마 올려다보지 못하고 붉은 당신의 신발을 눈빛으로 오밀조밀 뜯어보곤 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내가 보일법한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며 무릎을 숙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라며 평소와는 어울리지도 않는 투정을 부렸고 나는 당신을 닮은 색을 볼에 담은 채 당신과 겨우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당신은 그런 나를 강하고도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 큰 검을 쥐던 손으로 내 얼굴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나는 적에게는 의심치 않고 검을 휘두르던 당신이 검을 쥐던 탓에 생긴 굳은살에 내 얼굴이 상처라도 날까 손가락으로 톡톡 치던 그 모습이 너무나 당신 같지 않고, 그리고 너무나 당신 같아서 내 손으로 다 감싸 안지도 못할 손을 꽉 잡아 내 얼굴에 닿게 했다. 언제나 그랬던 일이었지만, 당신은 그럴 때마다 눈이 커다랗게 커지며 여태 내 이름을 부르던 온데간데없고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당신의 손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지 않았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데다, 온갖 잔상처가 매일 새롭게 생겨 그 딱지 때문에 따갑기도 했다. 그래도 세상 어떤 손보다 가장 부드럽고 나를 자상스럽게 대해주던 사랑스런 손이었다.
그런 당신이 달라진 건 적을 해치우다가, 실수로 그 검에 내 손등이 살짝 베였을 때였다. 실제로 당신 벤 것도 아니면서 당신은 그 이후로 달려오던 적을 베지도 못하고 허공만을 가르고 있었고, 보다 못한 동료들이 당신에게 휴식을 권했다. 그 이후로 당신은 나와 웃으며 얘기를 하다가도 내 손등의 상처를 보면 내 목소리는 들은 체 만 체 하며 묵묵히 밥을 입에 그대로 쑤셔 박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당신의 이름을 애타게 목이 쉬어라 불러도 당신의 어깨만이 내 말에 대답하며 움찔거리고 있었을 뿐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내 활의 끝에 있던 자신만만하고 아름답게 춤을 추듯 검을 휘둘리던 당신은 사라졌다. 당신이 아끼던 검의 손잡이는 당신의 온기가 아니라 차가운 공기와 이슬이 대신하고 있었다. 내 시선 끝의 당신은 이제 왼손만을 멍하니 바라보며 있었다. 그러다 당신은 심호흡을 내쉬며 왼손으로 이슬이 감싼 손잡이를 세게 쥐었고, 검을 들어 올리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며 검을 떨어뜨렸다. 내가 사랑하던 당신의 모습 하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지금 내 모든 감각은 잠든 당신을 향하고 있다. 내가 손을 뻗어 살며시 당신의 머리를 올려주려고 했을 때였다. 당신의 왼손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파르르 떨려오는 입술에는 내 이름과 ‘안 돼’라는 말과 함께 미안하다는 말이 끊임없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당신의 눈에는 이제 한 겨울 겨우살이처럼 강인하고 아름다운 눈빛이 아니라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눈물만이 마르지 않는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내가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신의 앞, 옆, 뒤를 지켜주던 사람들이 무너지고 쓰러질 때도 그 흔한 눈물 하나 흘리지 않던 당신이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눈물 흘리고 있었다. 나는 떨림이 멈추지 않는 당신의 손을 다 감싸 안지도 못할 내 손으로 겨우 붙잡고, 남은 손으로는 당신의 눈물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울었을까 당신이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밀어내더니 당신의 손을 잡고 있던 나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봤다. 나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당신의 시선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부끄러움 따위는 저 멀리 내 던지고 천천히 당신과 시선을 하나하나 맞췄다.
“리르.” 당신이 한참을 울어 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네, 엘리시스.” 나는 당신의 눈 근처를 배회하던 내 손가락으로 차분히 당신의 눈, 콧대, 입술을 그렸다.
내 목소리를 듣자 당신의 시선은 내가 아닌 내 손등으로 향했다. 선혈이 그대로 남아있던 손등은 이제 까무잡잡한 흉터와 딱지만 남아 거의 아물고 있었다. 내 손등을 보자마자 당신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변했다. 내가 황급히 뒤로 손등을 숨기려하자 당신은 내 손을 가볍게 낚아챘다.
“이 상처, 내가 그런 거지? 리르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알 수 있어. 리르는 거짓말을 할 때, 미간을 살짝 찌푸려. 알고 있었어? 솔직하게 대답해줘. 나는 이제 너에게 신뢰를 잃은 건가? 네 앞에서 널 지켜야 할 내가 널 다치게 했잖아.” 당신은 내 손등을 보며 쉰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며 조용히 당신의 손목에 입 맞췄다. 내가 아직 당신을 그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고, 사랑한다는 마음을 담아서.
“엘리시스, 절 똑바로 봐요.” 나는 당신의 얼굴을 돌려 나를 보게 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요. 엘리시스, 당신이라고 실수를 안 할 순 없어요. 당신이 제게 한 건 그저 한낮 실수에 불과해요. 당신이 나를 그대로 벨 의지가 있다고 해도, 나는 내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믿어요. 나는 엘리시스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당신을 좋아해요. 내가 먼저 당신을 버릴 일은 없어요. 당신이 나를 버려도.” 엘리시스는 내 말을 듣자마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연신 저었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사랑해.” 엘리시스는 나를 당기더니 나를 품에 안았다. 내가 당신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자 손에 턱을 괸 채, 나를 자신의 옆자리에 눕히더니 이불을 그대로 내게 덮여줬다.
“오늘은 달이 아름다워. 날 좋아한다고 말해주던 너도 아름다워. 오늘은 나와 같이 있어줘.” 라며 내 귀를 간질이며 속삭였다. 나는 당신의 품에 한 걸음 다가가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