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끝에서]
“말해봐. 내가 죽으면 너는 행복할까?”
너는 어제처럼 오늘 학식이 뭔지 말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말을 입꼬리마저 한껏 올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가볍게 말했다. 나는 여태까지 네 말끝이 내 귀에 도달할 때까지 그 찰나의 순간동안, 네가 원하는 바를 놓친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네 말의 의도를 알아챌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은. 너는 그런 내가 짜증나는 듯 코를 살짝 찡그렸다. - 너는 심기가 불편할 때마다 코 한쪽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었다. - 나는 그 순간 절망이라는 걸 맛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언제나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둘러싸여 있는 너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네가 나와 있을 때 단 한순간도 코를 찡그리지 않았다는 것, 그거 하나뿐.
“스가이.”
네가 내 성을 불렀다. 미약하게 네 다듬어지지 않은 송곳니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해. 내가 물었잖아. 내가 여러 번 말하는 걸 싫어하는 건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가면 속의 날 알고 있는 건 오직 너잖아. 내게서 유일한 존재.”
정확하게 끝나지 않는 문장. 떨리는 어깨. 네가 어떠한 감정이든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을 너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할 때마다 보이는 버릇. 지금의 너와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나는 옥상펜스로 뒷걸음쳤다. 내가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네 신발소리가 또각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았는데도 내 등 뒤에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시멘트바닥, 구름에 가려진 별, 아지랑이처럼 번지는 달 따위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더 이상 너의 시선에서 도망칠 곳은 없어보였다. 위험해. 도망쳐. 내 본능이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명령을 내렸다.
“아카넹, 내일 얘기하자. 지금은 아니야.”
“말이 많네. 머리가 울려. 내 이성과 분노의 임계점은 높지 않아.”
너는 네 머리를 깊게 쓸어 올렸다. 무언가를 벗겨내려는 것처럼. 그리고 곧 당장이라도 달빛이 내려와 미끄럼틀을 타고 놀던 네 미소를 거뒀다. 기분 좋게 올라가있던 네 입꼬리는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내려왔다. 네가 가리고 있던 가면이 산산조각 났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던 네 표정. 언제나 완벽해야만 하는 네가 평생 감춰야만 했던 또 다른 너. 너는 그대로 내가 겨우겨우 벌려놓은 너와 나의 거리를 한 걸음에 따라잡았다. 그리고 내 곳곳을 이리저리 훑었다. 나는 네 시선에 어찌할지 몰라 여기저기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네 시선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때마다 숨을 들어 내쉬었다. 손목을 살짝 돌려 손목시계를 확인하려는 찰나였다.
“가만히 있어.”
넌 그대로 네 손을 들어 올려 내 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난 그대로 컥하는 소리를 내며 너를 올려다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이 그대로 까맣게 변할 것만 같았다. 내 눈가가 촉촉해지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네 손목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너는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촉감에 놀란 듯 그대로 시선을 내렸지만 내 손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자신의 손목을 잡고만 있는 것이 즐거운 듯 웃어보였다.
“나는 역시 우는 네 모습을 제일 사랑해.”
너는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이런 내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속삭였다. 너와 내 키 차이가 크지 않는 탓에 조금만 내려도 내 귓가는 네 입술과 마주할 수 있었다. 너는 내게 사랑을 말하며 더욱 더 나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내 귓가는 네 숨결을 아직까지도 천천히 감상하는지 네가 날 사랑한다고 한 그 마디만이 계속 맴돌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네가 날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눈길에 응답하듯 너를 사랑을 담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끝이 부드럽게 아래로 흩어져 내리는 눈 -나는 잠든 네 눈가를 쓰다듬는 걸 제일 좋아했다- 은 내가 언제나 바랐던 것처럼 나만을 가득 담고 있었다. 눈썹 위를 보기 좋게 가리는 앞머리. 물 흐르는 것처럼 그려진 적당한 눈썹. 웃을 때마다 가득 차오르는 애교살. 벚꽃을 잔뜩 버금은 네 입술은 마치 이 밤이 하루의 시작인 것처럼 날 보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너에게 잘 어울릴 거 같아 지나가는 가게에서 이끌리듯 사버려서 충동적으로 선물한 가죽쟈켓에는 달빛이 가득 묻어있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웃는 너를 사랑해.'
나는 차마 네게 전하지 못할 말을 감은 눈 속에서나마 너를 마주보며 전했다.